2022年을 마무리하며

기껏 블로그 만들어 놓고 올 한 해 글을 딱 두 篇만 쓰는 것、게다가 그 中 하나가 마지막 날에야 부랴부랴 쓰는 이런 글이라는 것이 참 寒心하다。그럼에도 2022年만은 꼭 記錄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올 해 내내 들었다。내게 많은 일이 일어났던 탓이다。

보낸 家族

四月에 二十年 가까이 함께 지냈던 강아지 밍키를 떠나 보냈다。何必이면 아버지 生辰에。밍키가 가장 따르던 게 아버지고、밍키를 데려온 것도 가장 아끼던 것도 아버지인데。어쩌다 보니 내가 病院에 가서 밍키의 屍柩를 받게 되었다。그대로 집에 데려와 하루 동안 寢臺에 함께 누운 채 보고 또 보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아무리 봐도 便히 잠든 것 같고 今方이라도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개가 二十年 살았으면 長壽한 축이라 하는데、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다시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리고 딱 한 달 지나 五月에 어머니가 癌으로 苦生하신 끝에 돌아가셨다。밍키가 떠나고 놀라서 그러셨을까、그 즈음부터 健康이 빠르게 안 좋아지셨다。안 그래도 몇 달 안에 고비가 올 거라는 느낌이 들어 前보다 자주 찾아 뵙긴 했지만、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다。아침에 아버지 聯絡을 急히 받아 本家에 가보니 어머니는 極甚한 괴로움을 줄이기 爲해 訪問 看護師가 모르핀을 여러 次例 投與한 뒤였고、譫妄으로 家族 모두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셨다。그나마 多幸이라면 家族 모두가 臨終을 지킬 수 있었던 것、그리고 마침내 숨을 쉬기 어려워 할 무렵 다함께 울며 어머닐 부둥켜 안고 사랑하고 未安했다고 한 말들을 정말 들으신 듯、우리가 그 말을 하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暫時 바라본 채 잠드셨다는 것이다。

한 달 사이에 家族이 둘이나 떠나니 精神을 차리기 힘들었다。葬禮를 마치고 일터에 復歸할 땐 어른스럽게 個人事를 分離하겠노라 생각했지만 誤算이었다。얼마 못 버티고 한 달쯤 休職을 하게 되었다。實은 아직도 以前처럼 일을 해내지 못하는 걸 느낀다。눈에 띄게 不振한데도 아무 말 없이 내가 했어야 하는 일도 代身 해주는 팀 同僚들에게 한 해 동안 정말 未安하고 고마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사셨고 동생도 나도 서로 獨立해서 살고 있었기에、이제는 모두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아버지나 동생이 혼자서 외롭지 않을까 걱정되어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그래서 實際로 어머니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됐을 때는 두 집 살이처럼 지냈던 것 같다。바빠지며 다시 자주 못 보게 되었는데 마음 한 켠에서 神經이 繼續 쓰이는 것도 요즘의 苦悶이다。

맞은 家族

슬픈 일만 있던 것은 아니다。아주 기쁜 일도 있었다。戀人이었던 俐思와 結婚을 했다。婚姻申告는 바빠서 아직 하지 못했다。사귀기 始作한 날에 맞춰서 婚姻申告도 하자는 얘기를 했다。둘 다 極히 內向的이며 부끄러움도 많이 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모두 불러서 잔치의 主人公까지 되어야 하는 結婚式은 無理였다。結婚式은 안 하기로 했고、우리에게는 그게 너무 當然했다。代身 가까운 親戚들을 만나고 다녔고、寫眞作家인 俐思의 親舊와 내 오랜 親舊 둘을 집에 불러 집과 동네에서 조촐하지만 예쁜 結婚寫眞을 찍었다。살면서 寫眞撮影이 이렇게 재밌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올해 가장 즐거웠던 하루이다。그게 어쩌면 우리에겐 結婚式이었던 것 같다。

너무 힘든 한 해였지만 俐思에게 기대면서 버틸 수 있었다。俐思도 사랑하는 토끼 둘을 떠나 보낸 적 있어서、내가 밍키를 보내며 後悔가 남지 않도록 많은 配慮를 해줬다。밍키가 오래 살아서 언제 떠날지 모르겠다는 말에 밍키와 꼭 닮은 모헤어 人形1을 만들어 준 게 昨年 生日이었다。밍키를 火葬할 곳도 俐思가 찾아 줬고、밍키의 遺骨을 녹여 만든 돌들을 밍키 人形에 담아 주기도 했다。遺品 整理도 代身 해 줬다。

어머니 葬禮式 때도 사흘 내내 우리 家族과 함께 있어 주며 모든 것을 도왔다。우습게도 兩家 父母님이 처음으로 만난 자리도 葬禮式場이 되었다。어머니가 擧動이 힘들 程度로 몸이 안 좋아지신 탓에 兩家 人事를 줄곧 미뤘기 때문이다。그래도 俐思는 어머니를 實際로도 映像通話로도 여러 次例 뵌 적 있고、어머니가 俐思를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 같다。집에서는 정말 자주 울었는데、그 때마다 俐思가 날 많이 안아 주고 같이 울어 주었다。丈人어른과 丈母님2께서도 나와 우리 아버지를 많이 걱정해 주시고、내게 많이 마음을 써 주셨다。

삶의 무게 中心

實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왜 살아야 하는지、살면서 무얼 좇아야 하는지 생각할 일이 많아졌다。일이나 實力 같은 것들은 結局 삶을 營爲하는 方便일 뿐、當場 來日모레 죽는다 치면 다 무슨 所用인지。다들 하는 陳腐한 얘기인데도 그 陳腐한 생각이 지난 몇 달 동안 마음에 가득 찼던지…

얼마 뒤 죽는다면 뭐가 가장 後悔될까 생각하기도 했다。아마도 所重한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얘기하지 못한 것、그들이 내게 얼마나 所重한지 그들에게 얘기하지 못한 게 아쉽고 後悔될 것 같았다。어머니가 떠난 뒤 내게 남은 後悔가 온통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率直히 호강 못 시켜드리고 자랑 할 만한 아들이 되지 못한 것은 그다지 後悔가 안 됐던 것 같다。자주 못 뵙고、얘기 더 못 나누고、고마움이나 未安함 같은 속마음을 제대로 말 못하다가 떠나시기 直前에야 急히 얘기했던 게 後悔되어 자주 울었다。어머니 뿐만 다른 사람들과도 비슷할 것이다。나도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그들도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말로 하기 부끄러우면 葉書라도 쓰고、자주 못 만나면 電話라도 많이 걸자는 다짐을 했다。

안 그래도 內向的이었는데 코로나19 탓에 지난 몇 해 더욱 杜門不出했었다。조금씩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다녔던 것 같다。率直히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에 사람들을 當場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자주 만나두지 않으면 또 後悔를 할 것 같다는 不安이 생겼다。만나면 寫眞도 찍고 비디오도 찍었다。生前 어머니 寫眞이나 비디오가 많지 않아 너무 後悔스러웠기에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뭐라도 좀 찍어야겠다 싶었다。돌이켜 보면 한두 달은 살짝 強迫도 생겼던 것 같다。그 즈음에는 만나서 얘기하는 것을 죄다 錄畫하느라 보름에 數百 기가바이트씩 쌓였다。

한便으로는 내가 平生 즐거워 하던 코딩을 많이 줄였다。줄이려고 한 건 아닌데 손에 거의 안 잡혀서 좀처럼 集中할 수 없었다。趣味로 짜는 코드도 그랬으니 일로 하는 건 오죽했으랴。休職을 한 달 하긴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休職을 半年쯤 하고 싶었다。實際로 半年 넘게 生產性이 바닥이었다。根本的으로는 내가 짜는 코드가 그렇게 쓸모가 있지 않다는 自覺이 자주 들었던 것 같다。그러니까、코딩을 처음 해 본 十代 때부터 昨年까지는 내가 기껏 만든 코드가 實은 그다지 쓸모가 있지 않다는 客觀的인 判斷을 코딩을 한참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지 못했다。沒頭할 수 있었던 것이다。다 만들고 나서 時間이 좀 지난 뒤에 熱情이 漸次 식으면서、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만든 코드를 쓸 데가 매우 限定的이라는 것을 깨닫는 式이었다。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코딩하는 동안 每日 드니 코딩할 氣運이 안 난다。그리고 내가 만든 코드가 어떤 사람들에게 꽤 有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그 사람들이 내 코드를 活用해서하고 싶어하는 일들이 크게 意味가 있지는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어서、그런 마음도 코딩할 動機를 많이 抑制하는 것 같다。

綜合的으로 보면 삶에서 長期 投資에 가까운 것들의 價値를 낮게 보게된 것 같다。코딩도 現在를 써서 未來를 便하게 하는 手段이니 할 마음이 같이 준 게 아닐까。그런데 現在의 나는 이러한 새로운 態度가 그저 悲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오히려 어떤 側面에서는 더 賢明해지고 있다는 느낌도 받는다。

2023年은 어떻게 살까

올해가 내 人生의 큰 轉換點이 된 것은 分明하다。이미 많은 價値判斷이 옛날과 크게 달라졌다。다만 살던대로 살려고 하는 慣性이 問題이다。나이도 들면서 體力이 떨어지니 마음도 바람과는 다르게 많이 미끄러진다。어제 했던 다짐도 자고 일어나면 都統 實行에 옮길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新年에는 어떻게든 體力을 늘리려고 한다。그게 되어야 다른 내 바람도 實行할 수 있을 것 같다。


  1. 사람 模樣이 아닌 털 장난감도 人形이라고 부르는 게 조금 거북하다。↩︎

  2. 俐思는 이런 呼稱들을 싫어하지만… 글에서 第三人稱으로 부를 말이 窮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