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중앙 게임, 그리고 블록체인과 NFT

2018년 여름 5년 넘게 일했던 스포카에서 나와 플라네타리움으로 옮긴 이래, 흔히 블록체인 게임이라고 불리는 탈중앙 게임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몸담은 지 벌써 5년째를 맞이하게 됐다.

그 동안 여러 이슈를 마주하며 생각이 달라진 부분도 있지만, 탈중앙 게임의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이 바뀌진 않고, 오히려 정교해진 것 같다. 그러나 같은 비전 아래 나아가는 팀 안에서도 저마다 크고 작은 생각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나도 팀과는 독자적으로 나름의 생각을 글로 다듬어 보려 한다.

이하의 모든 졸견은 내 멋대로의 생각일 뿐, 내가 속한 회사 및 동료들의 입장과 독립적라는 점을 밝혀둔다.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의 중앙집중 거버넌스 문제

개인적으로는 게임을 탈중앙화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몇몇 장르의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온라인 게임 운영사는 일반적으로 게임 플레이어와 이해가 불일치하거나 대립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이 규탄하는 게임 운영사의 횡포는 다양하다. 심한 과금 유도, 플레이어들의 바람과는 상반되는 업데이트 방향, 고시된 아이템 획득 확률이 실제 구현과 다른 것 같다는 의혹, 갑작스러운 섭종 등.

플레이어들이 겪는 이러한 어려움을 설명하는 몇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온라인 게임 서비스 각각이 그 안에서는 불공정 독점 시장을 형성한다는 인식이다. 어째서 플레이어들은 사실상 꽝뿐인 아이템 팩, 즉 저품질의 재화를 그 가격에 강매하게 될까? 다른 품질의 아이템 팩을 다른 가격에 파는 사람이 없고, 오직 게임 운영사만이 그 판매권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Apple의 앱 스토어가 독점적 지위로 여러 불합리한 거래를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온라인 게임 첫 세대부터 운영사의 그러한 독점을 우리가 승인해 왔다 보니 그런 지위를 내려놓으라는 운영사에 향한 요구가 생소할 뿐이다.1

게다가 많은 시간과 돈을 써서 얻은 게임 내의 모든 것은 운영사가 자의적으로 서비스를 그만두면 그 즉시 물거품이 된다. 싱글 플레이어 게임이라면 남이 맘대로 내 세이브 파일과 게임 패키지를 통째로 없앨 수도 있는 리스크가 있는 것이다.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게임은 시간만 쓰는 게 아니라 돈도 쓰는 경우가 많은데다, 큰 회사의 대작이 아니라면 서비스가 5년 넘게 운영되는 경우가 흔치 않으므로 더 리스크가 무겁다.

위와 같은 점들을 따져보면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들은 싱글 플레이어 게임들에 비해 훨씬 소비자 보호 수준이 떨어진다는 문제의식에 이른다. 이런 차이는 싱글 플레이어 게임은 제작사 손을 떠나 소비자가 구매한 이후로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스스로의 기기에서 실행하는 반면, 멀티플레이어 게임은 게임을 즐기는 것과 운영 및 실행하는 것이 다른 주체에 의해 이뤄지고 그 둘 사이의 이해득실이 서로 간섭하기에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시각에서,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의 운영 거버넌스를 탈중앙화하여 위와 같은 문제들을 완화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탈중앙 게임의 구현 수단으로서의 블록체인

현재 탈중앙 게임블록체인 게임은 거의 같은 말로 쓰이고 있다. 요즘에는 NFT 게임이라는 말로 더 많이 불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견으로는 이 말들을 구별해서 쓰고 싶고, 적어도 이 글에서는 그러고자 한다.

탈중앙 게임이라는 것은 멀티플레이어 게임의 거버넌스에 관한 말로, 이는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탈중앙 게임과 중앙집중 게임 사이에 뚜렷한 구분선이 있다기 보다는 정도의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이를테면 게임의 클라이언트와 서버를 모두 오픈 소스로 배포한다면, 그것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탈중앙화를 이룰 수 있다. 게임이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게 고쳐서 재배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2

그렇지만 게임의 소프트웨어 부분뿐만 아니라, 운영되는 게임 내 세계까지 탈중앙화하고 싶을 수 있다. 같은 게임을 서비스하는 주체가 여럿 있을 수 있다고 해도, 내가 고른 운영 주체가 멋대로 데이터베이스에 손을 대거나 금방 서비스를 종료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는 오픈 소스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데, 이를 위해 블록체인이 쓰인다. (또는, 그런 명목으로 블록체인을 도입한다.)

블록체인 게임은 게임의 구현 세부사항으로, 그 자체로는 플레이어 입장에서 좀더 가치 중립적이다. 현재 게임을 블록체인으로 만들었을 때의 이점으로는 주로 둘 정도를 꼽을 수 있겠는데, 하나는 앞서 말한 운영의 탈중앙화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초기 개발비를 모금하기 쉽다는 것이다. 모금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그렇다면 블록체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을 탈중앙화한다는 것일까?

이를 드러내려면 먼저 블록체인이 P2P 네트워크를 전제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블록체인의 탈중앙 거버넌스는 기본적으로 P2P 네트워크의 탈중앙 거버넌스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P2P 네트워크가 탈중앙화되어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P2P 네트워크인 비트토렌트를 어느 한 주체가 임의로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보여줄 수 있다. 비트토렌트 네트워크는 한두 주체의 담합으로 멈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누구도 쓰지 않게 되어 정말로 멈추더라도 이후 언제든 다시 누군가 두 사람이라도 비트토렌트 소프트웨어를 켜면 다시 굴러가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P2P로 구현하는 것으로 탈중앙화를 꾀하면 어떨까? 실은 P2P 멀티플레이어 게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를테면 《스타크래프트》의 멀티플레이 수단으로는 (제작운영사인 블리자드의 독점 중앙집중 서비스인 배틀넷 말고도) IPX를 쓸 수 있었고, 실제로 많이 썼다.3 그렇지만 이런 식의 IPX 멀티플레이는 대체로 방을 연 사람이 서버 역할을 하게 되어 있어서, 나머지가 그 방에 들어가는 식으로 주객의 구분이 존재했다. 많은 IPX 멀티플레이는 단 둘이서 즐길 때만 P2P처럼 동작했다. 게다가 모든 노드가 정직하고 소프트웨어적 조작이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맵핵 등의 부정행위에 취약했다. 이런 취약성은 부정행위의 효과가 30분 남짓의 한 판 안에서만 작용하는 《스타》 같은 장르의 게임에서는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울티마 온라인》처럼 판의 단락 없이 큰 단일 세계가 계속 이어지는 종류의 게임에서는 그런 부정행위를 못 본 척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세계가 계속되는 종류의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비트토렌트처럼 P2P로 구현하면 탈중앙화는 이룰 수 있지만 보안이 취약해지게 된다. 그런 게임에 한해 중앙에서 개입하는 운영 주체를 도입하지 않고서 보안을 확보하는 수단이 블록체인이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얘기하면, 탈중앙 거버넌스와 그런 수준의 보안이 함께 필요한 게임이 아니라면 굳이 블록체인까지 도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탈중앙화만 필요하다면 P2P 네트워크 위에서 돌게만 해도 달성할 수 있고, 혹은 부정행위만 막으면 된다면 신용할 특별 지위의 중간자를 두는 것으로도 훨씬 쉽게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타》나 《퀘이크》처럼 플레이어의 조작 숙련도가 승패에 주요한 게임은 어차피 입력기기 수준에서 부정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에4 블록체인으로 보안이 크게 나아지지도 않는다.

블록체인이 기술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게임에서도 여전하다.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노드가 느슨한 시간적 오차 내에서 같은 상태(데이터라고 말해도 좋다)를 가질 수 있게 하고, 상태 전이(데이터 갱신이라고 말해도 좋다)가 모든 노드에게 일관되게 적용되는 규칙과 권한 안에서만 (다시 말해 반달리즘 걱정 없이) 이뤄지도록 하며, 이 모든 것이 어떤 특별한 지위에 있는 주체 없이 돌아가도록 해준다. 그러니까 블록체인의 이러한 성질은 휘발성 데이터나 각자의 사적 데이터가 아니라 공공의 영속 데이터를 주로 다루는 소프트웨어에서나 의미가 있는데다, 그 소프트웨어가 반드시 탈중앙 거버넌스를 갖춰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오남용일 뿐이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도 소프트웨어이므로 같은 판단을 할 수 있다.

무분별한 블록체인 도입

그러나 이른바 블록체인 게임 업계에 몸담고 있으면 블록체인을 도입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곳에 블록체인을 굳이 어거지로 끼워넣는 사례를 자주 듣고 보게 된다. 솔직히 말해 그런 사례가 그렇지 않은 사례보다 훨씬 많을 정도인 마당에, 블록체인 업계에 대한 불신과 폰지 사기가 아니냐는 의심에는 아무리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다고 느낀다.

블록체인이 쓸모가 있는 게임이라고 해도, 정작 도입을 제대로 하지 않고서 블록체인 게임이라는 레테르만 붙이는 프로젝트도 정말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요즘 흔히 NFT 게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이름만 놓고 생각하면 NFT 게임은 게임 내에서 쓰일 수 있는 아이템들을 블록체인상의 NFT로 발행하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의외로 게임에서 블록체인을 아예 쓰지 않고 아이템만 블록체인 NFT로 발행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 운영이 여전히 사기업에 의해 독점적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아이템만 블록체인 NFT로 다루면 어떤 이점이 있는 것일까?

가장 자주 꼽히는 것은 바로 아이템을 게임 밖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도통 모르겠는 것은 그게 종래의 아이템베이와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운영사가 직접 수수료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건 플레이어에게는 딱히 도움되진 않는다)이나 훨씬 높은 가격에서 거래가 형성된다는 점이 다른 것일까? 그냥 아이템 거래소를 RDBMS 기반의 웹 서비스로 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에 대한 가장 흔한 답은, NFT는 블록체인 위에 기록되므로 변조나 복제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영속적이라는 정당화다. 이는 일견 이치에 닿아 있는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발행된 NFT 자체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여서, NFT가 가리키는 실제 게임 내 아이템에까지 보장되는 성질은 아니라는 허점도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세간에 NFT라 불리는 것들이 그렇지만, NFT 그 자체는 일종의 영수증 내지는 증권처럼 NFT가 가리키는 대상물과는 따로 떨어져 있다. 독점 운영사가 발급한 NFT 아이템은 게임이 섭종됐을 때 어디에 쓸 것인가? 섭종까지 가지 않더라도, NFT가 가리키는 아이템은 어차피 운영사의 게임 서버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있는데, 그 데이터베이스를 조작하지 않으라는 보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 운영사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신뢰해야 하는데, 그 시점에서 아이템을 NFT로 발행한 취지는 퇴색되어 버린다. 두부처럼 쉽게 부서지는 것을 사면서, 영수증만 강철로 만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5

독점적으로 운영되는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만 블록체인 NFT로 파는 방식은 블록체인 요소 없이 운영 주체의 서버에 모든 것을 다 두는 종래의 방식에 비해 복잡도와 구현 난도가 잔뜩 올라가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어야 한다. 졸견으로는, 그러한 합리적 필요성은 적어도 게임 내적으로는 찾을 수 없고, 아마도 NFT블록체인 같은 키워드가 붙어야 프로젝트의 주가가 크게 오르기 때문에 그러한 복잡성을 감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바람직한 블록체인 게임

글이 꽤나 여러 곳을 건들며 돌아다녔는데, 그렇다면 블록체인 게임은 어떠해야 할까? 몇 해 동안 씨름하며 절실하게 느낀 바는, 맨 처음 가장 중요한 것은 블록체인이나 NFT가 필요 없는 게임에 블록체인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게임을 전적으로 탈중앙화할 동기가 없다면 도입할 까닭이 없다. 탈중앙 게임을 만든다고 해도, 많은 경우는 블록체인 없이 소프트웨어 전반을 오픈 소스로 배포하고 P2P 네트워크를 도입하는 것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탈중앙화를 이룰 수 있다. 게다가 블록체인은 기술적 제약도 커서, 레이턴시가 짧아야 하는 게임에서는 무리다. 그럼에도 억지스럽게 블록체인을 끼워 넣는 프로젝트는 꾸준히 나타나는데, 이런 의사결정은 대체로 블록체인 기술의 특성과 한계도 모르고 구현 난도도 파악하지 못하는 경영진의 상명하달로 이뤄진다는 심증이 있다.

블록체인이 유용할 수 있는 게임이라면, 블록체인 도입을 하더라도 종합적 디자인이 블록체인의 용도를 무색케 하지 않도록 꼼꼼히 신경써야 한다. 기껏 게임에 블록체인을 도입해놓고 중요한 컴포넌트를 중앙화하면 (전문 용어로 오라클을 두게 되면) 특정 주체를 향한 신뢰에 의존하게 되는데, 전체 시스템에서 신뢰에 의존하는 부분이 조금만 많아져도 탈중앙 거버넌스는 쉽게 취약해진다. 블록체인은 신뢰에 의존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인데, 그럴 거면 블록체인이 없는 게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블록체인이 제 기능을 하려면 결국 게임 플레이에 필수적인 로직과 데이터는 모두 블록체인 위에 놓여야 한다. 아이템이나 게임 머니만 블록체인에 올리면 게임 자체가 오라클이 되어버린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칼이 NFT로 발행됐어도 게임 월드 내에서 휘두룰 수 없다면 쓸모가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니 블록체인 게임은 만들기도 성가시고, 성능도 떨어진다. 그렇기에 그런 역기능을 감수하고도 블록체인만의 기능인 탈중앙 거버넌스를 열망하는 프로젝트에서만 블록체인 도입이 의미가 있다.

블록체인을 원칙대로 게임에 적용하더라도, 게임이 탈중앙 거버넌스와 어울리는지 역시 따져봐야 한다. 현재 블록체인의 가장 큰 기술적 한계는 레이턴시가 종래의 방식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길다는 것이다. 종래의 온라인 게임에서 기술 타당성을 검토할 때 네트워크 레이턴시의 구체적 허용 범위는 밀리초 단위를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블록체인은 빨라봐야 초 단위에서 움직인다. 이를 게임에서 활용하려면 기다림을 게임 디자인의 일부로서 곳곳에 받아들여야 한다.6

또, 탈중앙 게임은 업데이트도 간단치 않다. 커뮤니티 피드백을 취사선택하여 닫힌 조직 안에서 발전 방향을 정할 수 있다면 빠르고 좋겠지만, 오픈 소스 프로젝트처럼 결정 자체를 열려있는 커뮤니티 안에서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이 BIPEIP니 하는 꽤 복잡한 의사결정 체계를 갖추고 있고, 네트워크 프로토콜을 바꾸는 것은 개헌을 하는 것처럼 어렵고 가끔씩 일어나는 일로 인식된다. 그러다보니 사소한 변경은 모두 블록체인 위에서 데이터와 스마트 콘트랙트를 업데이트하는 것만으로 가능하도록 발전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블록체인 게임도 업데이트를 자주 하지 않고도 게임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될 필요가 있다. 게임 로직의 많은 부분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웬만하면 영구적이거나 초장기적으로 그리고 전역적으로 작용될 적고 단단한 룰로 구성하고, 그 위에서 노는 플레이어들의 창발적인 상호 작용이 그 자체로 즐길거리가 되어야 한다. (말은 쉽지만 게임 디자인이 훨씬 어려워진다.)

나아가 콘텐츠를 주기적 업데이트를 통해 꾸준히 채워줘야 한다면 탈중앙 거버넌스와는 양립하기가 아주 어려워진다. 스토리를 포함한 콘텐츠는 규칙 한 두 개를 고치는 것보다 공공 합의가 훨씬 어렵고 (새 악역은 어떤 배경의 인물이어야 하는지를 어느 세월에 커뮤니티에서 모여서 정한단 말인가), 결과적으로 특정 주체가 독단으로 새 콘텐츠의 방향과 디테일 모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7

장래에는 새 콘텐츠의 방향과 디테일 모두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블록체인 위에서 할 수 있도록 고도화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게다가 그런 절차를 구현하는 블록체인상의 프로그램이 게임 자체보다 복잡성이 아득히 높을 것으로 보여서, 사견으로는 배보다 배꼽이 크지 않은가 하는 비관적 전망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아예 콘텐츠 업데이트를 지속적으로 하지 않아도 플레이어들끼리의 창발성이 재미의 열쇠가 되는 쪽이 훨씬 깔끔한 디자인으로 여겨진다.

마무리

내게 큰 다행이라면, 플라네타리움은 완전한 탈중앙 게임을 만들고자 모인 팀이라는 것이다. 게임을 전부 블록체인 위에 올려, 종국에 우리 개발팀이 모든 손을 놓더라도 게임을 즐기고 싶어하는 커뮤니티가 있다면 언제까지나 존속될 수 있는 탈중앙 게임을 만드는 것이 우리 팀의 목표이다. 이 글에서 참지 못하고 냉소적으로 쓴 부분들이 여럿 있지만, 이는 여태까지 한통속으로 싸잡혀 의심의 눈길을 받곤 했던 경험의 발로일 뿐이고, 사실 나 스스로는 이런 저런 말을 하기보다는 바람직한 블록체인 게임을 정말로 만들어내서 사람들에게 이런 게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긴 글을 마무리하자면,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1. 심지어 게임 운영사가 아닌 플레이어조차, 그러한 불균형까지 게임의 룰로 내면화한 나머지 아이템도 못 팔 거면 게임사가 게임을 왜 만들어야 하는데?라고 되묻기까지 한다. 독점권을 내려놓는다고 판매권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님에도, 운영사가 현재의 독점권 없이는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을 안 만드느니만 못한다는 생각으로 널뛰는 것이다. ↩︎

  2. 이러한 취지에서, 플라네타리움의 첫 게임 《나인 크로니클》은 아트워크까지 모두 AGPL 3.0으로 배포되고 있고, 실제로 인기 있는 다른 포크 프로젝트도 있다. ↩︎

  3. 90년대 말에는 PC방에 다같이 몰려가서 IPX로 《스타》 멀티플레이를 하는 일이 흔했다. 《스타》 뿐만 아니라 당시 멀티플레이가 가능했던 게임 대부분은 IPX 방식을 활용했고, 오히려 배틀넷 같은 독점 서비스 방식은 더 나중에 대중화됐다. ↩︎

  4. 요즘에는 FPS 게임 《PUBG: 배틀그라운드》에서 저숙련자도 겨냥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명 배그 핵 마우스 따위도 시중에 나와 있다. ↩︎

  5. 한편, 최근 NFT 열풍의 중심에는 NFT 디지털 아트가 놓여 있는데,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사람들이 디지털 아트를 실제로 손에 쥐고 싶은 게 아니라 (디지털 아트라 그럴 수도 없지만) 아티스트가 작품과 NFT를 소유한 자신의 관계를 공인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나 그걸 사람들 앞에서 보이고 싶은 과시욕, 내가 그 아티스트에 후원했다는 만족감 같은 것을 NFT가 채워준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만약 그러한 설명이 정말이라면 NFT 디지털 아트의 열풍은 오프라인 전시와 판매가 어려워진 코로나19 시국이기 때문에 진품 보증서 대용으로 각광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디지털 아트에는 적용 가능한 설명일지 몰라도, 게임 아이템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설명은 아닌 듯하다. ↩︎

  6. 한 때 인기 있던 징가소셜 네트워크 게임들이 썼던 장치들을 벤치마킹해 볼 수 있겠다. ↩︎

  7. 내가 속한 회사의 첫 게임 《나인 크로니클》도 이런 면에서 아쉬움이 많다. RPG의 특성상 단순한 무대만으로 재미가 성립되지 않고, 플레이어들은 콘텐츠를 소모하며 세계의 끝을 향해 좇아오기 때문에 새로운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기작은 창발적인 장르의 게임이 되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