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1
劉俐思를 따라 是枝裕和의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를 봤다。몇 番이나 눈물을 삼키느라 혼났다。퉁쳐서 말하면 總體的 亂局
과 시스테믹한 悲劇
이라 할 수 있을까。
人工的 構造物에는 宂長度(redundancy)가 있기 마련이라、한 두 部分이 故障 난대도 全體 構造物이 이루고자 하는 데에는 大槪 支障이 없다。따라서 構造物이 크게 誤作動 한다면 이미 여러 레이어에서 故障이 잔뜩
나 있다고 볼 수도 있다。「아무도 모른다」의 첫 半을 보며 느낀 것은、이들 家族에게 이런 悲劇이
왔다는 것은 곧 그저 한 두 가지의 잘못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더 큰 레벨에서、곳곳의 잘못이 累積된 것이여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었다—그래서 總體的 亂局
。그러나 終盤에 가서는 이 생각이 다시 뒤집히고 말았다。이런 家族 한 둘쯤 悲劇的으로 生命을 잃는대도、우리 大部分이 社會 시스템의 利器(機能)를 누리는 데에는 아무 支障이 없으며、따라서 그들의 죽음 따위는 우리 中 아무도 모른다
—卽、시스테믹한 悲劇
으로、그러한 悲劇들은 나머지 우리의 삶을 누리기 위해 시스템의
餘分(redundancy)으로 機能
한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인데、이제는 페이스북을 안 하게 되어 이곳에 올린다。↩︎